시사

권영국 대선 후보에 대하여 - 레드카드 뒤에 숨은 열정과 신념의 여정

lifepol 2025. 5. 29.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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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국의 레드카드 뒤에 숨은 열정과 신념의 여정

5월 29일, 오늘은 권영국이라는 이름이 대선 토론의 레드카드로 화제의 중심에 선 날을 되새기며, 그의 삶과 정치적 여정을 탐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뜻밖의 주목을 받은 권영국 후보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노동과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이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그의 출생부터 학창 시절, 노동운동과 변호사 활동, 그리고 정치적 행보와 공약까지, 권영국이라는 인물을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정치적 도전이 아니라, 신념으로 가득 찬 한 사람의 삶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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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에서 시작된 여정

권영국 후보는 1963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났습니다. 태백은 한때 광업으로 번성했던 지역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소멸 위기에 직면한 곳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백에서 광부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지만,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권영국 후보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경북 문경에서 보내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그곳에서 졸업했습니다. 이후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현 포스코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빠르게 취업을 준비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포항제철공고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학업에 몰두하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81년, 그는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입학하며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 이룬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히 개인적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학 시절, 그는 사회적 문제와 마주하며 점차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갔습니다.

학생운동과의 첫 만남: 신념의 씨앗

권영국 후보는 처음부터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포항제철공고의 선배들이 교복 자유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을 때, 그는 이를 단순한 과시나 공부 회피로 여겨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1970-80년대 한국은 독재 정권 아래 학생운동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시기였습니다. 시위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참여하지 않으면 소외되는 분위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권영국은 이러한 흐름에 냉소적이었고, 자신의 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입학 후, 그의 시각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전두환 정부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학 선배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특히, 한 선배가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외쳤던 구호는 권영국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장면은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그는 학생운동에 점차 참여하며 사회적 불의에 맞서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단순한 일화가 아니라, 그의 신념이 싹트는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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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첫 좌절: 폭발 사고와 퇴사

대학 졸업 후, 권영국은 인천 부평에 위치한 구리합금 제조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의 노동 환경은 열악했고, 노동자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했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동운동은 단순한 권리 찾기가 아니라, 사회적 금기와도 같았습니다. 그의 노력은 회사 내 폭발 사고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 사고로 동료 직원이 사망했고, 권영국은 이에 항의하며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문제 삼아 그를 강제 퇴사시켰습니다.

퇴사 후, 그는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을 이어갔지만, 이 과정에서 폭력 행위 처벌법과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전과가 생겼습니다. 1991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법적 문제가 발생하며 그의 투쟁은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 시기는 권영국에게 좌절과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 executiver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더 큰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새로운 전환점

권영국 후보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전환점은 1999년 제41회 사법시험 합격입니다.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법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경력을 쌓아온 그가 단 3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그의 끈기와 지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회사에서 해고된 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법 공부를 시작했고, 37세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전환점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 그는 노동 인권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적극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SPC 제빵 노동자 사망 사건, 구의역 참사,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건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검찰에 4번 기소되고 경찰에 5번 연행되는 등 많은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법적 지원을 넘어,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기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정치적 도전: 경주에서의 시작

권영국 후보는 2016년부터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경북 경주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15.9%의 득표율로 낙선했습니다. 2020년에는 정의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에서 다시 도전했으나, 11.57%를 얻으며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2024년에는 녹색정의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지만, 당 전체가 2.14%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의석을 얻지 못했습니다. 2025년 조기 대선에서는 민주노동당(구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며 그의 정치적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경주에서의 출마는 단순한 지역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9년 용산 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 후보(새누리당)에 맞서기 위해 경주를 선택했습니다. 용산 참사는 철거민과 경찰 간의 충돌로 6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권영국은 이에 책임이 있는 김석기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경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경북 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하며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지속했습니다. 이 선택은 그의 신념이 단순한 정치적 계산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민주노동당과 대선: 새로운 도전

권영국 후보의 2025년 대선 출마는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의당은 녹색당과의 합당을 거쳐 잠시 녹색정의당이 되었다가, 다시 분리된 후 민주노동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습니다. 이 과정은 복잡했지만, 권영국은 사회대전환 대선연대회의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한상균 전 쌍용차 노조 위원장과의 경쟁에서 70.5%의 지지를 얻으며 단독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선은 7,559명만 참여한 소규모 이벤트였고,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영국은 2022년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이 4.14%를 득표한 덕분에 초청 후보자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토론에서 그는 레드카드를 꺼내며 “트럼프의 관세는 약탈이다. 미국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외쳤고, 이는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권영국의 공약: 노동과 약자를 위한 비전

권영국 후보의 공약은 노동자, 약자,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부자와 기업에 대한 강한 세금 정책, 노동자 보호,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을 강조합니다. 아래는 그의 주요 공약을 자세히 살펴본 내용입니다.

부자증세와 분배 중심 경제

권영국은 대한민국이 이미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상속세와 증여세를 강화하고, 법인세 최고 세율을 40%로 상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부유세를 도입해 자산 100억 이상 보유자에게 매년 1-3%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는 노르웨이, 스페인, 스위스에서 시행 중인 부유세를 참고한 정책입니다. 그는 세금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세금 효능감’을 강조하며, 세금이 공공복지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동자 중심 정책

노동운동가 출신답게, 그의 공약은 노동자 권리에 중점을 둡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4인 이하 사업장에도 적용하고,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며, 노란봉투법을 시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연차휴가는 현행 15일에서 25일로 늘리고, 장기적으로 30일까지 확대해 ‘안식월’ 개념을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프리랜서와 배달 기사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고, 청년 니트(NEET)층을 위한 공공 일자리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환경과 지속 가능성

권영국은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화석 에너지 기업에 톤당 11만 원, 일반 기업에 톤당 1만 원의 탄소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2035년까지 탈석탄을 완료하고, 내연기관 자동차 신규 판매를 중단하며, 2040년까지 탈원자력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넷플릭스 같은 해외 플랫폼에 3% 디지털 서비스세를 부과해 국내 매출을 공정하게 과세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습니다.

사회적 약자 지원

그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부로 개편하고 부총리급으로 격상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해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정의하고, 성별, 인종, 장애 등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청년 사회상속제를 통해 20세 청년에게 5천만 원 상당의 바우처를 제공하고, 자영업자 부채를 10-20년 내 상환하지 못하면 탕감하겠다는 정책도 포함되었습니다.

교육과 외교

교육 분야에서는 고등학교 내신을 전면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수능을 자격고사로 바꾸며, 자사고와 외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했습니다. 외교에서는 친미·친중 외교에서 벗어나 실용주의 외교를 강조하며, 북한과의 평화적 관계를 위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종전선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주장하며, 한미동맹이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로 인해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기타 공약

그는 종교 단체와 종교인에게 과세하고, 장애인 콜택시를 두 배로 확대하며, 최저 주거 기준을 4.2평에서 10평으로 상향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전세사기 피해자를 정부가 구제하고, 세입자의 무한 계약 갱신권을 보장하며, 임대료 상한선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너무덥답법’은 폭염으로 일을 못 하는 노동자에게 정부가 수당을 제공하는 독특한 정책으로, 그의 창의적 접근을 보여줍니다.

권영국의 한계와 가능성

권영국 후보의 공약은 이상적이고 급진적이지만, 현실적 한계도 분명합니다. 그의 정책은 막대한 예산을 요구하며, 부유세나 탄소세 같은 정책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그의 노동 중심적 시각은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포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젊은 세대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페미니즘과 노동운동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과 헌신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거대 양당에 편입되지 않고, 민주노동당과 정의당 같은 소수 정당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자신의 이상을 지켰습니다. 그의 레드카드 퍼포먼스는 단순한 쇼가 아니라, 글로벌 강대국에 맞서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상징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며, 기존 정치권이 외면한 의제를 공론화했습니다.

마무리: 권영국, 신념의 아이콘

권영국 후보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는 광부의 아들로 시작해 서울대생, 노동운동가, 인권 변호사, 그리고 대선 후보로 이어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공약은 급진적이고 논쟁적이지만, 노동자, 청년, 여성, 환경을 위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레드카드를 통해 국민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고, 이는 그의 신념이 단순한 말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5월 29일, 그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우리는 묻습니다. 신념을 지키며 세상을 바꾸려는 이에게 우리는 어떤 응원을 보낼 수 있을까요? 권영국 후보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다음 행보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우리 모두 주목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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